곤충의 미학

곤충이란 말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내가 여기서 굳이 새로운 모습이라 지칭하는 것은 곤충이란 말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얼마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이다. 나이 잡수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곤충이 뭐에요? 하고 물어보면 과연 몇 분이나 제대로 된 설명을 손자들에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버러지, 벌레? 하고 되묻지는 않으실런지, 어쩌면 이 벌레라는 단어야  말로 실상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곤충관 (곤충에 대한 생각)을 반영해 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벌레는 그야말로 벌레,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취급을 당하던 말이다.

벌레는 어째서 우리 인간에게 혐오스럽고  징그러운 이미지로만 쉽게 다가오는  것일까? 인간은 인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두 인간중심적이다. 하물며 나와  내 종족으로서의 인간만을 아는 인간이 아니라 내 주변의 생물을 인식하는  인간, 자연관찰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진화론적으로 유연관계가 가까운 생물을  보다 친근하게 느끼고 나와  비슷함이 멀어지면멀어질수록 동족의식이 약해지는 본능적 사고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여기에 원숭이와 메뚜기라는 두 가지 동물이 있다. 본능적 인간은 어떤 동물에게서  더한 친근감을 느낄 것이고 아량을 베풀 것이며 관심을 나타낼 것인가? 우리는 따뜻한 피를 가진 온혈동물이고 젖을 먹여 키우기에 더할 나위없이 이런 특성을 공유한 동물, 특히 포유동물에게 지대한 관심과 편애를 보인다 (물론 이러지조차 않는 인간도 많다). 그러나 벌레 한 마리쯤 때려잡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벌레, 곤충의 이미지는 우선 우리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체제가 너무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들의 딱딱한 이미지, 벌레로서의 이미지는  겉을 둘러싼 외골격에서 유래한다. 모든 외골격을 가지는 절지동물의 이미지가 다들 비슷하다. 외골격이란 수분의 증발을 막고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방지하는데 가볍고 튼튼한 소재로 유용하지만 이런 특성은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드러운  피부와 털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곤충은 내가 쓰다듬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서 부적합하다.  이들은 발로 밟아서 바삭하고 깨지는 소리를 들려줄 때 인간에게 야릇한 쾌감을 전해줄 뿐이다. 또 하나 이들은 유달리 다리가 많다. 다리가 6개나 된다. 그 중의  하나쯤은 떼어 버려도 아무렇지도 않다. 이들의 다리가 우리의 몸위를 기어가는 기분이란, 과연?  개가 혓바닥으로 주인을 핥아주는 기분과는 얼마만한 차이가 있는 걸까? 우리 인간은 원래 네 다리를 가진 동물이면서도 직립보행을 한다는 이유로 다리는 2개라고 하고 나머지는 새삼스럽게 팔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한다. 더구나 같은 네 다리를 가진 동물이 새삼스럽게 두 다리를 들고 일어나면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먹이를 구걸하고자) 모두들 박수를 치고 환성을 지른다. 마치 과거의 인간 진화의 역사를 지금 이 순간에 목격하는 것처럼 다들 신나한다.  그러니 두 다리를 가진 직립 인간이 6개나 되는 다리로 기는 동물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하물며 다리가 몇 배나 더 많은 다른 절지동물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참고로 직립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턱디스크, 허리디스크, 그리고 치질 등의 질환을 가져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놀라운 변신, 즉 변태를 한다. 물론 인간 중에도 변태는 있지만 곤충의 변태는 이들을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처럼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그렇게 급성장할 수 없고 이런 소재를 영화 속에  차용하고 싶어할 뿐이다. 또한 곤충의 피는 대개 붉지 않다. 이러한 근본적인 체계의 차이로 인하여 인간은 곤충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느낌으로 세대를 거듭하여 누적해 왔다. 아마도 원시인들은 벌레들에게 물리고 뜯기고 자원을 놓고 다투었을 것이다. 보통의 인간들에게 이런 벌레의 이미지는 집단무의식으로 승계되어온 것이다.

곤충이 주는 이미지에 대해 이미 알아보았듯이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는 우선적으로 징그러운 인상이  앞서기 쉽다. 그것은  무의식적이다. 물론 곤충 중에도 유달리 예쁘고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대상이  존재한다. 나비와 딱정벌레, 일부 노린재  무리는 화려한 무늬와 현란한 색채로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곤충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이런 대상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 외면당하는 대다수의 곤충은 칙칙한 색깔에 6개의 다리를 가지고 기는 벌레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자. 아름답고 추하고는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며 곤충의 구조는 진화의 극치의 소산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곤충의 외골격이  주는 이미지는 메카니즘적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프라모델, 혹은 로봇을 보는 기계적 즐거움과  흡사하다. 곤충의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자. 사람은 상대방을 인식할 때 무의식적으로 눈을 먼저 보게 되는데 이것은 포유류의 다양한 눈 인상이 감정을 전달하는 창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철골로 만들어진 자동차가 내 앞에 다가올 때에도 우리는  운전하는 사람의 모습보다는 습관적으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마치 동물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쳐다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눈을 통한 내면의 고찰이 곤충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들은 타고난 고정된 인상을 사람에게 줄 뿐이다. 어떻게 보면 곤충의 얼굴만큼이나 순수한 것도 없다. 노련한 동물은 그들의 감정을 얼굴로부터 속이며 연기할 수 있지만 곤충은 평생 한 가지 표정만을 지을 뿐이다. 곤충이 주는 기쁨의 또 하나는 그들의 다양성이다. 생물다양성의 정점은 곤충이며 평생 그것만을 들여다 본다 하더라도 다 들여다보지  못할 그 놀라운 다양성은 나처럼 쉽게 질리는 성격의 사람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 곤충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망할 때에 찾아온다. 물론  조그만 곤충을 수집하고 내 소유물인 것처럼 애착을 가질 수도 있으나 결코 자연 속의 곤충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어항과 화분 속에 자연을 가둘 수 없다. 또 어떤 곤충은 대단한 대접을 받고 어떤 곤충은  무시당할 만큼 쓸모없는 그런 곤충은  없다. 그들 모두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지분을 갖고 태어난 권리자들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스며나오는  이 평온한 감정은 자연의 형평성을 겸손히 이해하려는 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