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비밀


큰멋쟁이나비

2000. 5. 21

해가 뉘엇한 저녁 무렵,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동네 뒷산에 올랐다. 나무딸기와 찔레의 흰꽃도 만발하여 하늘소붙이를 비롯한 작은 곤충들을 불러 모우고 있었다. 발바닥이 좋아하는 흙과 낙엽을 밟으며 작은 등산로를 향해 걷고 있는데 사람들 머리 위로 후다닥 지나가는 저 날개짓은? 연이 어 어디선가 다른 날개짓이 날아와 접근하더니 두 날개 그림자는 중간에서 서로 마주보고 급하게 빙그르르 회전하며 밑으로 내려 가다가는 확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 눈을 어지럽힌 지점으로 달려가 보니 지극히 평범한 길인데 잠시 후에 녀석은 다시 날아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바쁜 날개짓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사람들 머리 위로, 또 참나무들 사이로 날아갔다 날아왔다 하는 씩씩한 날개의 장본인은 바로 큰멋쟁이나비 (Vanessa indica)였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이 녀석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참나무가 머리 위로 서서 그늘이 있고 약간 트여서 하늘이 보이는 10여 미터 남짓한 곳, 사람들이 이 길을 자주 왔다갔다 했지만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비는 일정 공간을 연이어 날아갔다 날아오는 순 찰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암컷으로 보이는 다른 나비와 마주치면 내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춤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꽃이 튀기듯 중간에서 만난 두 마리의 나비는 마치 단풍나무의 날개달린 씨앗이 빙글빙글 돌며 낙하하듯이 서로 마주보고 공중에서 땅으로 춤추며 급하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흩어졌다.

나는 이 놀라운 광경을 필름에 담아보려고 30분 이상을 한 자리에서 계속 지키고 있었으나 나비들의 안무는 너무도 빨리 진행됐 다가 끝나 버려 보통 사진기로는 도저히 그 장면을 찍을 수 없었다. 거의 쉬지 않고 몇 십분을 계속 날아더니던 녀석이 마침내 지쳤는지 바로 내 앞의 나무등걸에 살짝 내려 앉았다. 날개를 접은 큰멋쟁이나비의 색깔은 나무껍질과 무척 잘 어울렸다. 과연 이 녀석은 수컷일까? 그리고 춤을 추던 상대는 암컷일까? 아니면 경쟁자일까? 혹시 춤을 추다가 땅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아닐까 ? 그리고 교미로는 어떻게 이어지는걸까? 내가 지켜본 것만 해도 1시간 가까이였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얼마동안이나 계속되는 것일까?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 보고 계속 질문을 던졌으나 녀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느라 답하지 않는 걸까? 사람이 걸어오자 녀석은 겁을 먹고 또 훌쩍 날아올랐다. 이제 녀석은 참나무 위쪽로 솟아올랐고 해는 져서 더 이상 날아다니거나 춤추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