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2003. 1. 31 - 2. 3

     호텔앞. 한겨울의 밤 거리도 따뜻하기만 하다

1 월 31 일 마닐라 Metro Manila

밤늦은 시간, Cebu Pacific의 5J 비행기가 필리핀의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차가운 인천 공항의 공기가 따뜻한 열대의 공기로 바뀌는 순간이다. 필리핀은 우리 시각보다 1 시간이 늦어,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공항에 나와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동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공항 근처에서 들리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여기가 겨울이 없는 곳임을 알려 주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숙소인 Traders Hotel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2 월 1 일 팍상한 Paksangjan

아침 식사 후에 숙소에서 2 시간 가량 떨어진 팍상한 계곡을 가기로 되어 있다. 보트를 타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떨어지는 폭포를 맞으면 '팍 상한다' 고 해서 팍상한이란다. 젖어도 되는 옷과 갈아 입을 옷을 가져가야 한다. 버스로 이동 중에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처음 발견한 메뚜기는 바로 두꺼비메뚜기 Trilophidia annulata, 많은 차들이 주차하는 곳 바로 앞의 작은 화단에서 녀석을 발견하고 기뻤다. 그렇게 차와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곳에서도 작은 공간만 있으면 충분히 살아갈 녀석들이다. 점심을 먹고 구명조끼를 대충 걸친 뒤, 팍상한 계곡을 올라가게 되었다. 짙은 녹색의 강물을 거슬러 두 명의 사공이 우리를 폭포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물살이 얕은 곳을 만나면 사공들이 배를 거의 번쩍 들어 바위들을 헤치고 올라갔다. 매일처럼 이 일을 하는 이곳 주민들의 팔뚝이 굵고 검게 빛났다. 깎아 세운 절벽이 양쪽 편으로 서 있고 서늘한 그늘을 물 위에 드리웠다. 그 가운데서 제일 눈에 띠는 것은 물잠자리인데, 한국 것보다 다소 작아 보이며 그냥 앉아있으면 온통 까만 색이지만, 날개짓을 하면서 물 위를 살랑살랑 나풀거릴 때에는 날개 윗면의 파란 청록색 금속광이 번쩍번쩍 물위를 비추었다. 또 다른 한 종류는 더 작아서 우리나라 실잠자리 크기의 물잠자리인데, 분홍색과 청색이 도는 날개로 암수 한 쌍이 서로 어울릴 때는 이 곳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롱한 곳임을 자랑하는 듯 하였다. 중간에 베이비 폭포에서 잠깐 내려 쉬는 동안, 가시모메뚜기 Scelimeninae 종류를 채집할 수 있었다. 한국 것과 비슷하지만, 가슴 양옆의 가시모양과 등면의 울퉁불퉁한 질감, 눈의 툭 튀어나온 정도가 달라 보였다. 물 사이로 드러난 바위틈에는 매우 커다란 거미줄들이 쳐있었는데, 주로 수서곤충들을 노리는 것 같았다. 이끼 낀 바위틈으로 천천히 기어다니는 개미는 책에서 보았던 톡톡이 사냥꾼 같았으며 특이하게 옆으로 벌어진 이빨이 매우 독특하였다. 팍상한 폭포와 동굴에 잠시 들어가서 거세게 떨어지는 물세례를 받고 나왔다. 물을 많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내려오는 길에 보트 위에서 쓰고 있던 모자를 휘둘러 결국 빛나는 물잠자리 한 마리를 잡았다. 한국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해가 진 뒤, 곤충을 너무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호텔 앞의 공원에 나갔다. 얼핏보아 풀도 자라있고 야자나무 같은 것이 많이 서 있어 살펴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금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역시 희시무르귀뚜라미 Gryllodes sigillatus, 우리나라에서는 근래에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지만, 역시 전세계로 퍼진 강력한 번식력을 가진 종이다. 몇 가지 다른 종류의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 나무 아래 낙엽 등을 뒤져보았으나, 냄새가 심해 자세히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 필리핀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3 가지 자유가 있다고 하니, 바로 무단횡단의 자유, 쓰레기 투기의 자유, 그리고 배설의 자유라고 한다. 거의 모든 나무들마다 암모니아 냄새와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이것을 쳐다보고 있다가는 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높은 주파수로 들리는 소리는 바로 매부리족 Copiphorini의 특징이다. 전등을 살며시 비치니, 열심히 울고있는 머리가 뾰족한 녀석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녹색과 갈색의 두 가지 형태가 역시 모두 관찰되었고 언뜻 봐서는 우리나라의 좀매부리 Euconocephalus nasutus와 대만에서 보았던 Euconocephalus pallidus의 두 가지가 섞인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두어가지 종류의 쌕새기 Conocephalus spp.와 애기벼메뚜기 Oxya hyla intricata가 보였고, 특이한 울음소리의 긴꼬리를 잡았다. 이 종은 연갈색의 긴꼬리로서 투명한 날개 아래로 보이는 배 등면의 무늬가 전혀 우리 것과 다른 종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이것이 Oecanthus indicus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원 안에서도 여러 종류의 메뚜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2 월 2 일 따가이따이 Tagaitai

아침식사 후, 역시 숙소에서 2 시간 가량 떨어진 탈Taal 호수로 이동하였다. 어제 중간에 들렸던 휴게소에서 이번에는 나무 줄기에 붙어있는 특이한 뿔매미를 잡았다. 양 모서리가 매우 별나게 튀어나와 있고 뒤로 긴 뿔이 있는 종류였다. 나뭇잎 뒷면에는 깍지벌레 종류가 집단으로 이상한 무늬를 만들어 붙어 있었다.

탈 호수는 화산 활동에 의해 생성된 칼데라호로 매우 넓어서 파도까지 일었으며 동력보트를 타고도 한참을 가서 중간에 섬처럼 만들어진 이중 화산이자, 아직도 연기가 나는 활화산이라는 따가이따이에 도착하였다.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물가 주변에서 눈에 띠는 벌레를 찾아보았는데, 역시나 청분홍메뚜기 Aiolopus thalassinus tamulus가 이곳에도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 것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 물가 주변에 드문드문 나있는 식물 근처에서 여러 마리가 발견되었다. 물가 돌밑에는 조그만 강변애방아벌레들 Negastriinae이 떼지어 모여있었다. 이번 관광 프로그램은 말을 타고 화산에 오르는 것인데, 처음에는 타고 갔다가 내려올 때 걸어서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말을 타고 오르면서 주변 경관을 살펴보니, 지금이 한참 건기인 데다가 화산 지대의 먼지가 매우 심하게 많이 날렸고 식물은 거의 바싹 말라 있었다. 연휴에 관광 인파가 특히 많이 몰려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이중화산 분화구 아래 한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다시 호수를 건너는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청분홍메뚜기를 더 채집하였다. 동네 꼬마 아이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어 동전을 구걸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내가 잡은 메뚜기를 보여주자, 한 아이가 이것을 "삐딱롱" 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아이는 처음 보는 섬서구메뚜기 종류 Atractomorpha sp. 를 한 마리 잡아다 주었다. 속으로 반가우면서 그 댓가로 나는 동전을 주었고, 그러자 동네 아이들은 배를 타고 내가 떠나기 전까지 서로 메뚜기를 잡겠다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단순히 동전만 요구하던 애들에게 나는 경제의 원리를 알려 주었다.

호수가의 두꺼비   잎이 두꺼운 식물이 많았다

밤에 다시 호텔 앞을 돌아보고 희시무르귀뚜라미와 좀매부리 한 마리를 더 채집하였다. 커다란 이질바퀴 Periplaneta americana가 밤거리에 무척 많이 돌아다녔다. 필리핀은 미국 문화를 적극 수입하는 탓에 미국산 이질바퀴도 많은 듯 하다. 섬나라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의 문화에 대해 별로 꺼림낌이 없는 것이라고 할까.

 '죠의 아파트' 에서 나옴직한 이질바퀴가 구멍속에서 더듬이만 살레살레 흔들고 나갈 때만 엿보고 있다

2 월 3 일 마닐라 Metro Manila

시내 구경을 마지막으로 하였다. 벽에 붙어있던 매미나방 종류의 애벌레를 발견했다. 산티아고 요새와 시내 공원을 둘러보았다. 국가 유적지에 골프장이 들어서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노린재와 바퀴를 채집했다. 쇼핑하는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마닐라만의 바닷가를 잠시 살펴 보았는데, 사람들은 지저분한 물에도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해변에 비닐과 쓰레기가 많았다. 자연환경이 좋아서 그런지,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다. 비행기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 계곡으로 흰 눈이 내려 앉아있는 풍경이 한국에 다 왔음을 알려 주었다. 공항의 문밖에서 피부로 와 닿는 서늘한 공기가 반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