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박물관에 가다

2003. 8. 7 - 28

환전을 하고 짐을 꾸렸다.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뺄 것인가는 항상 큰 고민이다. 인천공항에서 JAL을 타고 먼저 일본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였다. 경제적인 여건상, 직항편보다 환승편을 이용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일본 방문 VISA를 끊어놓고도 다시 확인증을 받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우를 범했다. 초보자는 어디서나 힘들기 마련이다. 항공사에서 제공한 Nikko Narita Hotel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다시 JAL에 올랐다. 비행 시간만 12 시간이 걸리는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지루한 영화 관람과 기내식이 이어졌다. 마침내 런던 Heathraw 공항에 도착한 현지 시각은 8 일 오후 5 시, 시차는 우리보다 8 시간이 늦었다. 많은 인종과 언어가 뒤섞였다는 첫 인상을 받으며 tube라고 불리는 런던 지하철을 타고 Pimlico Street에 위치한 민박집에 도착, 시차 적응을 위해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영국 자연사 박물관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South Kensington에 위치한 영국 자연사 박물관의 정문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런던 시내에 위치한 Butterfly House, Kew Garden과 London Zoo 등을 두루 관람하였다. 사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유럽의 몇몇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산 곤충 표본들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다.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는 11-15 일까지의 방문을 사전에 허락 받았다. South Kensington에 위치한 자연사 박물관은 우리의 민박집 숙소로부터 버스를 타고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처음 방문이라 입구에서부터 무척 어색하기도 했지만, 이 곳의 메뚜기류를 담당하고 있는 Mrs. Judith Marshall 여사는 나를 친절하게 잘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이곳에서만 30 년 넘게 근무하다 보니 세계 각국의 메뚜기 전문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또 마침 이곳을 방문중인 송호준군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Ohio University에서 Cyrtacanthacridinae와 Schistocerca를 연구하고 있는 중으로, 메뚜기 연구하는 사람도 보기 드문데, 한국 사람으로 메뚜기를, 그것도 분류학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Marshall 할머니와 호준군의 도움으로 드디어 이곳에 소장된 메뚜기 표본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한국산 메뚜기목의 연구사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이 곳에 보관된 모식 표본들은 모두 빛이 바래고 적어도 100 년 이상된 것들이었지만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영국인 Walker가 1869 년에 'Catalogue of the specimens of Dermaptera Saltatoria and supplement to the Blattaria in the collection of the British Museum' 라는 책에서 Captain Belcher가 수집한 한국산 메뚜기 6 종의 발표가 우리에게는 최초의 기록이다.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들을 열며 확인해 본 결과, 그 당시의 표본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오른쪽 사진과 같이 단순히 'Corea' 라고 기입된 작고 둥근 라벨들이 붙어 있었다. 나의 예상대로 어떤 종은 확실하게 한국산이 맞았지만, 어떤 종들은 너무도 낯설어 당시의 선박들의 여행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등지의 라벨들로부터 잘못 혼동되어 정리된 결과라고 판단되었다. 어쨌거나 기록이 있으므로 이들 모두를 체크하고 슬라이드 사진에 담았다. 이 곳에 모인 세계 각지의 표본을 토대로 하여 많은 메뚜기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일이 다 볼 수도 없었지만, 특히 Conocephalus, Gampsocleis, Oxya, Acrida, Gastrimargus, Oedaleus, Trilophidia 등 한국에도 분포하는 속들의 분류 연구가 이루어져 잘 정리된 표본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매우 오래된 원기재부터 시작해서 온갖 메뚜기 문헌들이 다 갖추어져 있었는데 분류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곳이 무척 부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산으로 라벨이 적혀있는 사마귀, 대벌레, 집게벌레 등의 표본도 더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며 런던 생활에 적응할만 하자, 5 일간의 일정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다음 여정을 준비하였다.

독일 훔볼트대학 자연사 박물관 Museum fur Naturkunde der Humbolt Universitat, Berlin

유럽내의 이동 수단에 대해 결정을 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여기저기서 정보를 얻고 상의를 거쳐 다음 목적지인 독일 베를린을 향했다. 영국의 Ruton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먼저 대륙의 교통 거점인 네덜란드 Amsterdam에 도착하였다. 시차는 1 시간이 앞당겨졌다. 이 곳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도시처럼 곳곳에 바다가 보였고 입체적인 공간 구조가 돋보였다. 다시 Euroline 버스를 타기 위해 Amstel station으로 이동하였다. 출발 시간까지 기다리는 동안 역 주변 근처 수풀에서 울고 있는 Tettigonia viridissima를 한 마리 채집했다. 밤 11: 30에 출발한 버스는 한참을 가다가 새벽 4: 30에 독일 Autobahn Auetal 휴게소에 50분간 정차하였다. 졸린 눈을 비비고 마침 작은 소리로 울고 있는 Pholidoptera griseoptera 수컷을 한 마리 채집했다. 아침 9시, Zentraler Omnibusbahnhof에 도착, 다시 민박집이 있는 Ostbanhof 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하였다. 일요일이었고, 오후에는 Berlin Zoo를 관람하였다.


훔볼트 대학의 Zoological Museum

월요일은 박물관이 휴관하는 날이지만, 담당자와의 약속대로 찾아갔다. 나는 이 곳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고 가질 않았는데, 우선 나방과 날도래를 담당하고 있는 Dr. Mey를 만났다. 나방과 딱정벌레 같은 다른 분류군과 달리 메뚜기목은 항상 small insect groups에 속해 있는 편으로, 담당자인 Dr. Ohl은 마침 부재중이었으며 벌을 연구하는 것 같았다. 대신 이 곳에서도 여사님 한 분이 나를 안내해 주었다. Berlin Museum에 보관중인 한국산 모식 표본은 없었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참고하는 표본들을 둘러 보았다. 구북구에 분포하고 있는 메뚜기는 과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리가 되어 있었으며, 특히 과거에 러시아인 Ikonnikov가 발표한 종들의 paratype들이 여럿 눈에 띠었다. 최근에 러시아 과학원의 Dr. Gorochov가 정리했던 귀뚜라미 표본들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통일되기 전에 과거 동독의 동베를린에 속해있던 이 곳은 역사적으로 다른 공산국가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튿날, 북한 평양 등지에서 채집된 벼메뚜기 등 3 종의 라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독일의 박물관 등에 보관중인 중요 모식 표본들의 정보는 독일 메뚜기학회 DORSA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이미지 정보도 웹상에서 제공중이다. 우연히 이 곳을 들린 Dr. Heller와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Bioacoustics의 대표적인 학자로써 나와 문헌을 왕래한 적이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또한 기뻤다. 메뚜기의 분류와 생태에 대해 오랜 연구 역사를 가진 독일의 전통과 친절한 독일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박물관 일을 마치고 수요일에는 자유시간을 가졌다. 나는 Botanical Garden을 방문하여 Chorthippus parallelus, C. brunneus 등의 작은 애메뚜기류를 여럿 채집하였고 역시 울고 있는 Metrioptera roeselii를 수색하여 근처에 온 장시형 암컷을 채집하였다. 여우와 다람쥐, 물닭 등 각종 새들과 아름다운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저녁이 되어 다음 목적지인 부다페스트행 Euronight 기차에 몸을 실었다.

헝가리 자연사 박물관 Hungarian Natural History Museum, Budapest

침대칸인 쿠셋에서 일찍 잠이 깨어 창 밖을 보다가 여권 검사를 받았다. 밤새 오스트리아 빈도 들렸다고 하니, 어느덧 일본, 영국,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를 거쳐 6 개국의 국경선을 넘은 것이다. Keletipu 역에서 이곳 지하철인 Metro를 타고 지도에 나와있는 헝가리 자연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곳은 신관을 새롭게 개축하고 있는 중이었고 연구자들이 있는 건물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와 만나기로 한 Dr. Rongkay와 통화를 하여 그가 우리를 데리러 직접 찾아왔다. 한국에도 몇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다지만 나로서는 초면이었고, 훤칠한 키와 빠른 발걸음으로 길을 안내하였다. 박물관 1 층에 있는 Guest house에 짐을 풀었다.


Gellert 언덕에서 바라본 Budapest 시내의 전경

이 곳 직원들은 모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메뚜기류의 Collection을 담당하고 있는 Dr. Sziraki 역시 차분한 말로 나의 요구에 대해 설명을 잘 해 주었다. 헝가리 박물관의 세계 원정 채집과 화재 사건, 신축 등의 역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북한과는 1970 년부터 과학 교류 협정이 체결되어 채집 활동을 벌려온 결과, 이 곳 헝가리 박물관은 많은 북한산 곤충 표본들을 보관하게 되었다. 메뚜기는 폴란드의 Dr. Kostia가 동정한 것들이 모두 12 상자 속에 들어 있었는데 나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남한에서 흔히 보던 것도 물론 있었지만, 북방계 종들 중에는 전혀 남한에서 볼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Metrioptera bicolor, Chrysochraon dispar  등은 전혀 문헌상에 언급된 바가 없는 한국 미기록 종이었다. 필름이 모자라 시내에 나가 이를 보충하였는데, 일반적인 책자 안내와 달리 헝가리의 물가가 결코 싼 편은 아니었다. 유럽연합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싼 편이었지만, 우리의 물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화폐 단위의 인플레이션이 심했는데 장차 유럽 연합에 편입되면 가치가 더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빠른 속도 -우리의 2 배 이상- 만큼이나 헝가리 국민들이 발전을 바라고 있는 소망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밤에 숲에서 울고 있는 Ephippiger 수컷

토요일 오후에는 Dr. Rongkay와 그의 동생, 친구들과 함께 부다페스트에서 다소 떨어진 Csakva town에서 야외 채집을 하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덥지만 매우 건조한 여름날씨, 산이라고는 볼 수 없는 황갈색톤 일색의 유럽 풍경들이 많았지만, 이 곳의 Hajduragas valley는 해발 220-380 m의 석회질 산이었다. 바싹 마른 풀들 사이로 많은 메뚜기들이 뛰고 날고 울고 하였으며, 유럽 전역에서 보호되고 있는 Saga pedo가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해가 지기 전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Oedipoda, Platycleis, Oecanthus, Calliptamus, Stenobothrus, Omocestus 등 여러 가지 메뚜기들을 많이 채집하였다. Light trap과 sugar bait를 이용한 야간 채집이 이어졌다. 이번 여행이 어느덧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다뉴브강을 유람선으로 한 바퀴 둘러보며 유럽의 인상을 눈 속에 담았다. 그동안 느끼하고 끈기없는 음식들로 허전한 위 속을 달랠 겸, 부다페스트에 있는 한식집을 찾아 김치찌게를 맛있게 먹었다. 26일 아침 일찍 기상하여 Ferihegy II 공항을 떠나 다시 런던 Heathraw 공항에 입국, JAL 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일본 Osaka를 경유해야 한다. Kansai 공항에서 오사카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는 Dr. Shiyake와 만났다. 일본식 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그와 함께 근교의 이누나키산 계곡에서 하룻밤 야간 채집을 함께 하였다. 비교적 낯익은 일본의 메뚜기류도 여러 가지 채집했다. 다음날 점심 무렵, 많은 기억들과 무거운 배낭과 함께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착륙하였다.